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조선 수군의 후퇴 === [[파일:attachment/afterMyeongryang.jpg]] > 명량에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정예수군 333척을 대파한 직후, >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함대를 이끌고 금각포, [[소안도|당사도]], [[신안군|어의도]], [[영광군|법성포]], [[위도(섬)|위도]], [[고군산군도|고군산도]]로 이어지는 천릿길 수로를 통한 대장정에 돌입했다. > 이것은 당시 [[전라도]]를 점령, 포진한 왜군은 물론, 이미 [[충청남도|충청도]] [[직산읍|직산]]까지 진격한 왜군에게 > 서해안의 제해권이 조선 수군에게 있음을 천명, '''[[확인사살|그 예기를 꺾어버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 그 결과,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던 왜군은 [[임진왜란|보급로 차단으로 또다시 고립될 것을 염려하여,]] > [[순천]], [[울산]] 등지로의 퇴각을 서두르게 된다. >[br] > 한편, [[칠천량 해전|거듭되는]] [[남원 전투|패전]]으로 전라도의 육지 방어선이 모조리 무너지자 > 인근 도서로 피신한 채 '''[[사기(군사)|실의에 빠져있던 백성들은 크게 고무됐을 뿐만 아니라]]''' >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 ---- > 불멸의 이순신 97화 中 내레이션 >(중략) 우리를 에워 싼 적선 서른 척을 쳐 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로 진을 옮기어 밤을 지냈다.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 - 난중일기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미 전라도 전역에 일본 육군이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도 잠시 북쪽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아무리 수군이 강해도 수군 기지는 항구에 있고 왜군이 육지 쪽에서 공격해오면 보급물자 없이는 뗏목에 불과한 조선수군이 자력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6일 17시경에 일본수군이 완전히 퇴각하였고 조선수군은 그날 명량해전이 있었던 울돌목에서 가까운 해남 우수영으로 새벽에 진을 옮겨 머물다가 해류를 타고 준비해두었던 당사도로 이동해서 식수를 보급하고 숙영한다.(17일 오침) 그리고 같은날 신안 어의도(지도)로 이동했는데 이 때 현령들이 찾아와 명량의 승전을 치하하고 양식을 준다. 18일에도 어의도에 머물고 19일에는 함대가 영광 법성포로 이동 20일에는 영광 위도로 이동 21일에는 충청도의 섬인 고군산군도(선유도)로 이동해서 12일간 머문다. 10월 3일에는 다시 고군산군도를 출항해서 8일에는 어의도, 9일에는 해남 우수영에 다시 복귀해 3일을 머물고 10월 11일에는 신안 안편도에 있다가 29일에 새로운 통제영인 목포 고하도에서 108일간을 머물며 함대를 재건한다. 고군산군도에서 이순신은 명량 대첩의 승첩을 알리는 장계를 써서 27일 조정으로 올려보냈다.[* 노량해전을 제외한 이순신의 장계는 기록에 남아있는데 유일하게 명량해전의 장계만이 전해지지 않는다. 선조가 장계를 받아본 것은 확실한데 전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선조가 읽고 파기했다는 설도 있다.] 이에 따라 왜군도 서해로 북상하여 이 과정에서 간양록을 남긴 [[강항]]이[* 육군 소속으로 군량을 담당하는 자였으나 집으로 복귀 후 뗏목을 타고 피란가던 중 일본군에게 잡힌다] 영광에서 왜군에게 잡혔고, 일부 왜장이 배로 전남 무안까지 다다랐음을 기록에 남겼다.[*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부하인 노부시치로라고 적었는데,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다.] 즉 엄밀히 말해 일본군이 서해로 진입하는 것에 완벽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 몰아쳐서 끝냈으면 조선 수군을 이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 않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일본군은 조선수군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 임진년 이래로 처음 진출해보는 서해안에 신안과 무안의 수많은 섬과 갯벌을 마주쳐야 했고, 좁은 섬들 사이로 어디에 숨어있을지 모를 조선 수군의 공격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다시 전투를 해야하는데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었다. 정찰을 통한 지형 및 적의 군세 파악+각종 정보 수집+작전 계획 수립 검토+사령부의 승인+병력 및 물자 소집[* 군인 수천 수만 명이 하루에 소비하는 식량과 물자는 장난 아니게 많으므로, 예상 소비량을 계산한 뒤 소비 계획을 세워서 최대한 비축한 뒤 전시에 들어가야 한다. 보급을 제대로 안 하면? 그 많은 병력들이 빈손이 되거나 밥을 굶는다.], 병력 충원[*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병력을 동원하여 아군 물량이 많은 상태에서 적을 격파하는게 당연히 유리하므로, 각지에 있는 군대들이 합류하기까지도 또 시간이 걸린다. 전시에는 더더욱 전투에 대비해 편제, 편성을 손보고 결원은 보충 요청을 해서 병력이 도착할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보급선 유지 확보, 병장기 생산, 공격에 대비한 전술 훈련을 거쳐야 하므로 준비에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연락을 사람이 직접 하던 시절이니 더더욱 느렸을 것이다. 한마디로 명량 해전의 패배 1번으로 일본군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해버린 것이다. 일본 수군은 당연히 12척에 불과한 수군 쪼가리들은 가볍게 밟고 진군할 것을 전제로 출정했을 테지만, 그 전제가 어그러졌으므로 다시 계획을 짜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수백 척 함대가 13척 함대를 못 이기고 거의 궤멸 직전이 되어 돌아왔으니 왜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을 것이 자명하다. 결국 궁극적 목표를 놓고 보았을 때 왜 수군은 서해안으로 세력을 확장하거나 서해안에 상륙하여 육군과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육상전력이 우세해도 해로를 통한 보급을 받지 못하면 그저 잠시동안일 뿐이다.[* 애초에 조선은 육로 정비를 등한시하고 해로 수송에 몰빵한 국가라 육상에선 대군을 움직일만한 보급을 원활히 하는게 거의 불가능하던 상황이었다.] 당초 왜군의 목표였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왜 수군을 격퇴하는 위업을 이루면서 멀쩡하게 남아 있었고, 게다가 칠천량 해전 이후 숨어 있던 장수들이 줄지어 함대를 이끌고 합류하면서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붙어도 이긴다고 보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왜군은 이순신의 기함 판옥선 한 척조차도 격파하지도 못 하고 쩔쩔매기만 했는데, 칠천량 이후로 흩어져 숨어있던 일부 해군과 백성들이 합류해 조선 수군이 어느 정도 다시 재건되었다. 싸우러 나섰다간 격파는커녕 도리어 자신들이 격파당하게 생긴 상황이 된 것이다.] 게다가 이순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군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우스갯소리로 조선군 육군 전체와 싸우기보다 이순신의 함대와 싸우기를 더 무서워했으리란 말이 있는데, 실제로도 조선 수군은 왜군보다 이순신을 더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아예 헛 말은 아닐 것이다.] 왜군은 결국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기대를 접어야만 했다. 이때 왜군 사이에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앞으로 진짜 희망이 없다며 체념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이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褊裨)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通諭)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 이 당시에는 소금이 매우 비싼 값에 판매되는 물품이었다. 기록상 2개월 이내에 수만 석 곡식이면 엄청난 가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 >─ 이항복, <백사집> 고 통제사 이공 유사(遺事) 반대로 조선군 사이에선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가 흘렀다. 왜 수군이 육군과의 공동 작전을 펴기 위해서는 최소한 수군이 독립적으로 금강 하구, 가능하다면 한강 하구까지 진출해서 보급거점을 만들었어야 하지만 이것은 실패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왜 수군은 서해안 확보에 실패했다. 또한, 이때의 전투 결과로 숨어있던 수군 장수들이 병력을 이끌고 다시 이순신과 합류하여 칠천량 때의 3분의 2에 약간 못미치는 수준의 전력을 회복하게 된다. 조선 수군의 부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